4세 약사

HOME 뿌리탐구 4세 약사
1세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
휘는 구(구), 자는 헌지(獻之), 시호는 정간(貞簡). 세종대왕의 제4남이며 모친은 소헌왕후 심씨이다. 대군은 성품이 조용하고 인자하며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학문을 닦는 데 힘써 시·서·경·사와 병서를 공부하였다. 또한 사물제작의 정교한 솜씨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받았다. 재능을 안 세종대왕은 화포제작의 감독을 명하였다. 대군이 제작한 화살은 종전에 2∼3백보 나가던 것이 천여 보 안팎까지 나갔다. 군사기기의 성능을 개량하기도 하여 대군은 `병기와 군사에 관한 지보(至寶)'라고 불렸다.
  대군은 평생을 정의·성실·청렴·검약으로 일관하였으며, 부귀와 사치를 멀리 하였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중에 가장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또한 의기는 활발하고 의론에 뛰어나 사람들을 항상 감동시켰다. 무예에도 능하여 어전 시궁시 강궁으로 명중시키는 데 남달리 뛰어나 부왕과 문무백관의 예찬도 받았다.
  20세 전후에는 기녀 금강매를 첩으로 두었는데 부왕의 경계하라는 말씀을 들은 뒤로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 단종의 선위(禪位) 전후 수양대군은 여러 아우들의 동정을 살피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대군은 피눈물을 머금고 단신으로 대궐을 떠나 광주 의곡, 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慕洛山)으로 은신하였다. 산중벽처에 초가를 세우고 불상을 설치하고 참선하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조석으로 산 정상에 올라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며 종묘사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단종대왕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유배당한 영월을 바라보고 절하여 전왕을 흠모하는 마음을 빗대어 산이름을 `낙양을 사모하는 산'이란 뜻으로 모락산이라고 불렀다. 망배(望拜)하던 바위를 `사인암(斯仁巖)'이라 명칭하고 주변 일원 마을을 `의곡동(義谷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1469년(예종 1) 세조대왕이 승하한 지 몇 달 후인 이듬해 정월 5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함은 평생을 청백하게 살고 절개를 지켰으므로 정(貞), 진실하고 대쪽 같다 하여 간(簡)을 쓴 것이다.
  자손들에게 유훈을 남겼는데 첫째는 `왕자, 왕손 간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 것', 둘째는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사후에 조가(朝家)의 예장을 받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쓰고 이어 `나는 본디 안평(安平)형님과 금성(錦城) 아우와 더불어 함께 절의에 죽고자 하였다' 하고 붓을 놓고서 숨을 거두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유지를 참작하여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신도비는 세우지 않았다. 후세에 묘비만을 세우고 행장은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지어 석함(石函)에 담아 상석(床石) 밑에 묻었다 한다.
2세 오산군(烏山君) 1437∼1490
휘는 주(澍)이고, 시호는 정목(靖穆)이다. 대군의 장남으로 궁중에서 나서 세종대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44년(세종 26) 공의 나이 8세에 비로소 정의대부(正義大夫) 오산군에 봉해지고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이르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글을 널리 배워 경전과 사서를 읽었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현명하였다. 또 종친의 분수를 지켜 덕(德)을 감추고 일에 대처함이 현명하여 세조대왕은 때때로 공을 불러 나라 일을 자문하고 술자리도 베풀어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문소전 사옹원의 제조가 되었는데, 직무에 임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1490년(성종 21)에 54세로 별세하였다. 성종대왕은 매우 슬퍼하며 부의와 조제문을 내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언덕에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배위는 찬성 창녕성씨 임(任)의 딸과 연안김씨 둘이다. 창녕성씨는 풍기군부인(豊基郡夫人)에 봉해지고 아들은 없고 딸 둘을 두었으며 풍기군부인(豊基郡夫人) 연안김씨는 창평수(昌平守)·희제정(稀蹄正)·적천수(赤川守) · 홍양수(洪陽守)·덕안도정(德安都正)·엄천수(嚴川守)·온천수(溫川守) 등 7남을 두었다.
2세 귀성군(龜城君) 1440∼1479
휘는 준(浚), 자는 자준(子濬)이다. 대군의 2남이며 제안부부인(齊安府夫人) 전주최씨의 둘째 아들이다. 등준시 무과에 등과하여 장원급제하고 1467년(세조 13) 5월에 길주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켜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임금은 공을 4도병마도통사로 삼고 조석문(曺錫文)을 부장으로 삼았으므로 병사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격파하여 8월에 평정하고 9월에 개선하였다.
  세조대왕은 종재(宗宰)로 서울 교외에서 마중하게 하고 술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원훈을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이라 내렸다. 이로 인해 이듬해 4월에 명나라 사신 강동옥(姜東玉)이 와서 공에게 비단 세 필을 예물로 주었다. 1468년(세조 14) 특별히 영의정을 삼았다.
  그러나 1470년(성종 1)에 무고죄로 경북 영덕군 영해면 영해부로 귀양갔다.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세조대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왕손이 모함당한 것을 애처롭게 여겨 음식과 약재를 갖추어 내려주었다. 불행히도 후사가 없이 그곳에서 1479년(성종 10) 생애를 마쳤다. 1687년(숙종 13) 참판 리선(李選)이 상소하여 신원을 간청하여 훈작이 회복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황제의 특명으로 정양군(定陽君) 순(淳)의 11대손 해상(海尙)을 봉사손으로 정하고 1900년(광무 4) 고종황제는 부조지전을 베풀고 `충무(忠武)'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배위는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 청주한씨로 좌의정 백륜(伯倫)의 딸이다.
2세 정양군(定陽君) 1442∼1492
대군의 3남으로 휘는 순(淳), 자는 비숙(卑叔)이다. 모친 제안부부인 최씨는 증 우의정 승녕(承寧)의 딸이다. 세조·예종·성종의 3조를 섬겼다. 일찍이 공은 종친부와 내수사 사옹원의 도제조를 맡아 정1품 흥록대부를 받았다.  공이 병이 들었을 때 성종대왕은 의사와 약을 하사하였으며 그 후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철시하였다. 또한 부의를 내리고 관부에 명하여 후하게 장사지내게 함으로써 남다른 은총을 보였다.
 배위는 풍천군부인(豊川郡夫人) 진주강씨 감사 자평(子平)의 딸이다.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2세 영양군(英陽君) 1458∼1526
휘는 함(涵), 자(字)는 자허(子虛)이며 대군의 6남이다. 1458년(세조 4) 1월 5일에 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모락산 밑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부부인 안동안씨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재질이 뛰어났다.
 임영대군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유훈하기를 “나의 죽을 해는 이미 정해졌으니 남은 날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마땅히 선왕의 법복, 법언, 법행을 살펴야 한다. 깊이 마음에 새기라.” 하였다. 1469년(예종 1년) 정월 21일에 임영대군이 별세하였을 때는 공의 나이 12세였다.
 상을 당하자 석달 동안 죽을 먹고 3년 동안 여막에 거처하였다. 또한 어머니를 섬김도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경사(經史)를 통달하였으며 약관에 성리학 이치를 궁구(窮究)하였다. 처음에 영양부정(英陽副正)에 봉해지고 이어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어 관직에 오른 지 10년 동안 나라와 종실의 안녕에 힘썼다.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추증받았다.
 1526년(중종 21) 3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69세이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철조(撤朝)하고, 예관 안당(安塘)을 보내어 과천현 동면 장의동(지금의 서초구 서초동)의 건방을 등진 언덕에서 장사지냈다. 후에 서울 도시확장 계획으로 말미암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 산1번지로 천묘하였다.
 배위는 평산신씨와 청주한씨이다. 현부인(縣夫人) 평산신씨는 참판 윤범의 딸로 두 아들과 딸을 두었으며, 묘소는 실전되었다. 현부인 청주한씨는 영의정 명회(明澮)의 손녀이고 참봉 복(福)의 딸로 5남 1녀를 두었으며, 기일은 1515년(중종 10) 12월 28일이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장남은 하빈수(河濱守) 인손(仁孫)·차남은 동산수(洞山守) 의손(義孫)·3남은 오성도정(烏城都正) 신손(神孫)·4남은 해구군(海口君) 현손(賢孫)·5남은 청화군(淸化君) 준손(俊孫)·6남은 장연부수(長連副守) 종손(終孫)·7남은 능성령(陵城令) 말손(末孫)이다. 맏딸은 평택임씨 응교(應敎) 준(畯)에게, 둘째 딸은 예안이씨 우후(虞候) 계홍(繼洪)에게, 셋째 딸은 여흥민씨 훈도(訓導) 수건(壽騫)에게 각각 출가했다
2세 윤산군(輪山君) 1462∼1547
휘는 탁(濯), 자는 자광(子光)이며 대군의 8남이다. 공은 성품이 맑고 고요하여 오직 화초 기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성종대왕은 종실의 몸가짐과 품행이 방정한 사람을 가렸는데, 공이 선택되었다. 처음 품계는 부정이었으나, 도정·명선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생질인 신수근(愼守勤)과 절친하다는 죄로 김해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복직되었다. 1541년(중종 36)에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라 봉군되고, 1543년(중종 38)에 다시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올랐다. 1547년(명종 2) 82세로 별세했으며, 묘소는 광주 의곡, 지금의 의왕시 학의동이다.
3세 봉산군(鳳山君) 1469∼1519
휘는 돈(敦), 자는 자후(子厚). 대군의 손자이며 정양군의 아들이다. 성품이 맑고 깨끗하며 꽃과 대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했으며 바둑과 술을 즐겼다.  1483년(성종 14) 봉산정(鳳山正)이 되었으며 위계가 창선대부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임영대군의 봉사손을 계승하였으므로 봉산군에 제수되어 위계가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1513년(중종 8) 소릉(昭陵)의 대전관이 되어 특별히 가덕대부(嘉德大夫) 종1품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병환으로 51세에 별세했다. 부음을 들은 중종대왕은 몹시 슬퍼하고 이틀 동안 철조하고 철시를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배위는 군부인 윤씨 호군 주(柱)의 딸과 증참판 청송심씨 원(湲)의 딸이다.
3세 덕림군(德林君) 1482∼1541
휘는 자(孜), 자는 근보(勤甫)이며 정양군의 네째 아들이다. 공은 강직하고 정직하여 집안의 모범이 되고 종친간의 예법에 대해 밝았다. 1536년(중종 31) 승헌대부 정2품이 되었다. 나라 경사의 예법을 잘 알아 중종대왕의 공주와 옹주의 혼인 예식을 맡았다. 공의 형 봉산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공의 형제 중 현명한 사람을 가려 임영대군의 종통을 잇기로 결정했다. 공이 이에 해당하여 덕림정에서 덕림군이 되었다.
 배위는 진산현부인(晋山縣夫人) 진주강씨이며 사평 학손(鶴孫)의 딸이다. 슬하에 진천군(晋川君) 옥정(玉貞)과 부림부정(富林副正) 옥곤(玉崑) 등 2남을 두었다.
4세 진천군(晋川君) 1513∼1583
휘는 옥정(玉貞), 자는 백강(伯剛)이고 덕림군의 장남이다. 진양부정(晉陽副正)에 있다가 1544년(중종 39)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올라 진천군으로 봉해졌다. 공은 천성이 명민하고 처사가 정확하였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며 또 겸손하고 근신하여 분수에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라에 국상이 나면 3년 동안 혼전(魂殿)에서 윤번으로 번을 들었으며 전례에 따라 직품을 올려 주어 당연히 받아야 할 차례에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니 아버지 덕림군은 건강을 염려하여 금주를 호소하자 그로부터 술을 끊고 평생토록 한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효심과 굳은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질이 하도 포악하고 비행이 잦은지라 한번은 불러다 심하게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는 앙심을 품고 진천군을 모함하고자 친구인 홍린(洪麟)을 사주하여 “진천군이 역모를 꾸며 왕이 되고자 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의 진상을 밝히고자 여러 사람이 국문한 결과 무고임이 명백해지자 홍린은 무고죄로 사형을 받았다. 그러나 대간에서는 종실의 근친으로 있으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여 1550년(명종 5) 삭탈관직을 당했으며 3년 후 복관되었다.
 향년 71세로 별세하니 부음을 들은 선조대왕은 장례를 예법대로 하고 관에서 상사를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배위는 남원현부인(南原顯夫人) 남원윤씨로 증 판서 남원군 형(衡)의 딸이다.
4세 운양도정(雲陽都正) 1529∼1591
휘는 원(元)이고, 자는 군춘(君春)이며 오성도정(烏城都正)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총명하였다. 타고난 취미가 고상하여 무릇 사물의 이치의 정밀함과 제작의 교묘함에 관하여 환하게 깨달았다. 검약을 생활의 법도로 삼아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스로 먼 시골에 머물러 산수를 즐기면서 생애를 마치고자 만년에 남쪽으로 가서 구례현 서북쪽 천왕봉이라 일컫는 봉우리 아래 용계(龍溪)가 있고 수석이 기이한 곳을 만년의 안식처로 삼았다.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태고의 강산에서 태평한 시대의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출세하지 않고 시골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 된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하였다. 산과 물가에서 소요하였으나 그곳 사람들은 왕실의 지친이며 존귀한 몸임을 알지 못하였다.
4세 하산도정(河山都正) 1552∼1592
휘는 익(翼), 자는 덕보(德輔)이며 오산도정의 아들이다. 공은 처음에 하산부수에 제수되었다. 천품이 고결하여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다르고 기상이 엄연(儼然)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도정에 추증되고 임진록훈(壬辰錄勳)에 올랐다.
4세 은산령(殷山令) [1530(중종 25)∼ ? ]
휘는 온(溫).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海口君) 현손(賢孫)의 아들이다. 가선대부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4세 춘산군(春山君) 1540∼ ?
휘는 검(儉),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부령이었으나 아들 상룡(祥龍)의 추은(推恩)으로 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4세 홍산군(洪山君) 1553∼1608
휘는 득(得), 자는 신중(信中)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해구군의 아들이다.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어 총명하였다. “대장부가 세상에서 어찌 한갖 문묵(文墨)만을 숭상하랴. 또한 마땅히 무예도 겸비해야 하니 승평한 시대에는 성명을 도와 다스림을 이루고 병란을 만나면 적을 무찔러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하며 여가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왜적이 침범하자 “신이 비록 재략이 없으나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미약한 힘이라도 다하여서 국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하나이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임금은 크게 칭찬하고 부령에서 도정으로 승진시켜 신립(申砬)과 함께 가게 하였다.
 탄금대에서 관군이 크게 패하자 공은 겨우 피하여 곧장 대궐로 들어가 일의 시말을 갖추고 아뢰니 임금은 곧 순변사를 삼아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임진강을 막게 하였다. 추격하는 적의 장수를 목베고 풍덕의 화장포까지 진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길에 오르니 공이 이를 듣고 호종하기 위하여 곧장 의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듬해에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수성장이 되어 군진에 머물렀으며, 10월에 사복장으로 입직하여 다시 정의대부로 2품의 위계에 오르고 군에 봉해졌다. 1600년(선조 33) 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4세 한음군(漢陰君) [1540(중종 35)∼1618(광해군 10)]
휘는 현(俔), 자는 경연(磬然), 호는 교취당(交翠堂)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청화군(淸化君) 준손(俊孫)의 아들이다. 5세에 글을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며 자라면서 박학다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1562년(명종 17)에 영(令)에서 정(正)으로, 1579년(선조 12) 도정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위급함을 근심하고 정치의 폐단을 논하였다. 임금이 도성을 떠날 때 호종하다가 행전을 찢어 글을 써서 아첨하는 자들을 목베고, 인심을 수습하여 종사의 근본을 굳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 해 겨울에 윤두수(尹斗壽)의 청으로 2품에 올라 군에 봉해졌다. 1597년(선조 30) 중국 사신 양호(楊鎬)가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는데, 양호는 글 잘하기로 이름났으므로 조정의 의논에 따라 문사에 능한 이를 가려 영접의 임무를 맡길 때 임금은 특별히 공에게 명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선원록> 교정당상이 되어 중의대부에 올랐다. 1618년(광해군 10) 간신이 인목대비를 폐출하기 위하여 조례를 했으나 공은 대의에 입각하여 참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삭출당했다. 이해 8월 6일에 향년 79세로 별세하였다. 인조반정 때 관작을 회복하여 정2품 승헌대부로 추증되었다. 유고 두 권이 전한다.
4세 절신군(節愼君) 1546∼1594
휘는 수곤(壽崑), 자는 경로(景老),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윤산군(輪山君)의 손자이며 신성군(新城君)의 아들이다.  공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순진하고 솔직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말을 삼가고 행동은 예법에 따랐으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깊었다.
 1592년(선조 25) 왜구가 침범하자 선조는 급하게 피난을 떠났는데 공은 어가가 행차한다는 말을 듣자 곧 아들 충길(忠吉)과 함께 행장을 차려 호종하여 송경에 도착하자 임금은 묘사주(廟社主)를 목청전(穆淸殿)에 묻기를 명하였다. 공은 재상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우리들이 주상을 따라 온 것은 묘사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곳에 묻는다면 우리들이 다시 무엇을 바라며 적의 선봉이 이곳에 이른다면 다른 근심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으리까.” 하고 통곡하니 종실 해풍군(海豊君)이 “조정이 이미 정한 일을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하고 꾸짖었다. 공이 의리를 개진하여 울면서 말하니 대신이 공의 뜻을 임금에게 아뢰어 그의 뜻을 따르게 하였다.
 얼마 후 송경이 함락되었으나 묘사주가 다시 편안함을 얻음은 실로 공의 힘이었다. 임금은 박천에 이르자 분조(分朝)를 세우려고 계획할 때에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공이 사옹원 제조의 명을 받고 광해군을 따라 이천(伊川)에 머물렀으며 험한 곳을 지나면서도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일마다 공에게 묻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진사(進賜)로 불렀다. 왜구가 옥동을 경유하여 이천을 엄습하니 광해군이 서둘러 성천(成川)으로 갔다. 이때에 공의 아들 충길이 병으로 길을 갈 수 없게 되자 광해군이 듣고 특별히 말을 내어 타게 하였다.
 이듬해에 중국의 장수 이여송이 서경의 왜적을 소탕하자 적이 모두 남쪽으로 달아났으며, 광해군은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군대를 위로하고 돌아왔다. 왜군이 영남의 바다 위에 주둔하여 대치함에 승부가 나지 않으니, 공은 근심과 분함이 병이 되어 1594년(선조 27) 1월 등창이 나서 별세했다. 향년 49세이다. 임종시에 여러 아들에게 “국난에 충성을 못다하고 가니 지하에서 한을 품게 되었다.”고 하고 숨을 거두었다.
 공의 나이 34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묘소에서 죽을 먹으며 여막에 시묘살이를 하며 한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 복을 벗은 후에도 정성을 다하였으니 칭찬이 자자했다. 형 덕흥도정(德興都正)이 일찍 죽자 어린 조카들을 친자녀와 같이 양육하였다. 그때 이항복(李恒福)·이호민(李好閔)·이제민(李齊閔) 등이 한 마을에 살며 공의 행함에 감복하여 부모의 상사의 예를 신중히 한 것과 국난에 충정과 절의를 다하였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하여 예조에 정문(呈文)을 바쳐 아뢰어서 충신·효자로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1568년(선조 1) 23세에 정(正)이 되고 1587년(선조 20) 42세에 명선대부에 오르고 공이 돌아간지 10년 뒤인 1604년(선조 37)에 선조가 책훈하여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하고, 절신군에 봉하고 `충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또 `위성공'(衛聖功)을 녹하였으나 반정 후에 박탈당했다.  선조대왕은 교서를 내려 “경은 선파에서 분파되어 종실의 종영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공덕”을 칭송하고 호성공신 3등을 녹하고 군에 봉하였으며, 부모·처자도 1계급 올리고 생질·조카·딸·사위에게 위계를 올려 주었다. 또한 적자는 세습을 가능하게 하여 그 녹을 잃지 않았으며 죄를 사함이 영세에 미치도록 했다. 노비 7인, 전답 60결, 은자 5량, 의복감 1단, 말 한필을 내렸다.
4세 당은군(唐恩君) 1495∼ ?
휘는 휘(徽), 자는 자미(子美). 대군의 증손이고 오산군의 손자이며 덕안도정의 3남이다. 원래 부수(副守)였으나, 추은(追恩)으로 정의대부(正義大夫) 군(君)에 승차하였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61번지에 있으며 배위는 보성오씨 현령 황(滉)의 딸이며 합폄이다.